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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3 | 283 | == 숨겨진 원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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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4 | 284 | == 이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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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5 | 285 | 대기근으로 대약진운동은 철회되고,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청평 공산당 내부가 분열하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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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6 | 287 | 려우 즈카이의 뒤를 이어 국가주석에 취임한 류사오린은 공산당 총서기였던 덩사오핑과 함께 지성 중시, 도시 상업 중시, 대외적 균형에 정책 초점을 맞춰 대대적인 정돈 사업에 들어갔다. 1961년도에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 27%를 기록할 정도로 파탄 상태에 접어든 청평의 경제를 다시 성장 기조로 돌려놓는 데 성공하여, 1963년부터 1966년도까지 4년 연속 2자릿수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다. 류사오린은 "대약진운동은 인재(人災)가 7할, 천재(天災)가 3할이었다"고 말하며 국가 정책의 실패로 규정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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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8 | 289 | 려우 즈카이는 이에 대해 격렬히 반발했지만, 류사오린은 그의 면전에 대고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며, 역사책에는 식인행위도 기록될 것"이라고 폭언까지 퍼부었다. 이 시기 즈카이는 당 주석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국가주석은 류사오린이었기에 국가 최고 직위가 둘로 나뉘는 상황이 발생했다. 대약진운동 실패로 류사오린의 위세가 높아지자 즈카이는 수세에 몰렸고, 1962년 진행된 ‘7천인 대회’에서 스스로 자아비판까지 해야 했다. 이때 즈카이는 류사오린과 덩사오핑이 자본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주자파라고 의심했으며, 지식인들에 대한 불만이 쌓여 결국 역사적 사건인 ‘문화대혁명’을 터뜨리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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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2 | 293 | 그러나 1980년대를 기점으로 배급제는 점차 축소되었고, 1993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부족한 식량은 수입과 개간사업으로 보충되었으며, 위안룽핑과 같은 걸출한 농학자가 등장해 식량 생산량을 극적으로 늘리면서 아슬아슬하게 인구 증가를 지탱할 수 있었다. 덩사오핑 이후 개혁·개방 정책이 추진되면서 식량 부족은 사라졌고, 덩사오핑은 "청평 최초로 기근을 없앤 지도자"로 칭송받았다. 화운성에서 벌어진 무리한 징발과 기근의 악몽은 역사 속으로 묻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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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4 | | 여하간 대약진운동 직전 청평의 경제 상황은 낙관적이었지만,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이 겹치면서 "북산을 당장 따라잡겠다"는 호언장담과 달리 오히려 북산에 추월당했다. 다시 북산을 따라잡은 것은 40년 뒤의 일이었다. 그 사이에도 청평은 문화대혁명과 혼란으로 인해 플로렌시아, 서델라, 멕시코, 캐나다, 브라질, 동델라, 오스트레일리아, 스페인 등에 차례로 따라잡혔으며, 1981년에는 세계 13위 경제국가로 추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또한 1980~90년대 초반 청평의 경제력은 인구가 훨씬 적은 북령성 수준에 불과했고, 홍콩 반환 당시 홍콩의 경제력이 청평 전체의 1/5에 달했으며, 루이나의 경제력이 청평의 90%에 육박한 적도 있었다. 이후 개혁·개방으로 성장하면서 이들 국가를 다시 따라잡았으나, 2위 경제대국이 된 것은 2010년이 되어서야 가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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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5 | 여하간 대약진운동 직전 청평의 경제 상황은 낙관적이었지만,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이 겹치면서 "북산을 당장 따라잡겠다"는 호언장담과 달리 오히려 북산에 추월당했다. 다시 북산을 따라잡은 것은 40년 뒤의 일이었다. 그 사이에도 청평은 문화대혁명과 혼란으로 인해 서독, 멕시코, 캐나다, 브라질, 동독, 오스트레일리아, 스페인 등에 차례로 따라잡혔으며, 1981년에는 세계 13위 경제국가로 추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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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6 | 297 | 대약진운동과 비슷한 시기 사비에트에서도 유사한 ‘처녀지 개간 운동’이 있었다. 이를 보고 려우 즈카이가 자극을 받아 대약진운동을 추진했다. 그러나 사비에트의 농지 사정에 맞지 않는 농법과 무리한 수확 할당으로 사비에트의 농업과 낙농업은 큰 피해를 입었고, 이 일은 인터루쇼프의 입지를 약화시켜 그의 실각 원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사비에트는 청평과 달리 상황을 받아들이고 고랜드,오스트레일리아,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지에서 대규모로 곡물을 수입하여 청평과 같은 대기근은 발생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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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8 | 299 | 사비에트 농업은 집단농장 체제의 구조적 한계로 회복하지 못했고, 체제 붕괴 때까지 해외에서 식량을 수입해야 했다. 아무튼 처녀지 개간 사업은 실패했으나, 당시 생활수준을 보면 사비에트는 청평보다 훨씬 나았다. 사비에트는 텔레비전과 세탁기가 보급되었고, 고기를 일상적으로 소비했으며, 별장 문화가 퍼졌다. 반면 청평에서는 1980년대까지 자전거와 재봉틀이 혼수품이었고, 고기는 특별한 날에나 먹을 수 있었다. 이런 차이로 사비에트로 망명하는 청평인들도 존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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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0 | 301 | 이 사건의 여파는 청평의 고령 세대에서 "생존주의적 행동양식"으로 자리잡아, 오늘날까지도 사회 전반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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